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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잔다르크에 대한 미스터리, 마녀사냥 이유

by NARR 2024. 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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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다르크

잔다르크(Jeanne d'Arc)

 잔다르크는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백년전쟁(1337~1453) 당시 프랑스를 위해 싸운 영웅이자 성녀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과 죽음에는 여전히 미스터리하고 의문이 풀리지 않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특히 그녀의 죽음에는 마녀사냥을 당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인데, 이 과정에는 복잡하고도 의문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이 글을 통해 잔다르크의 삶과 그녀를 둘러싼 미스터리한 의문점, 마녀사냥 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잔다르크의 미스터리

잔다르크와 관련된 미스터리

신의 계시

 프랑스는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이후 프랑스의 대부분의 지역은 영국과 부르고뉴파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프랑스의 왕위계승을 주장했지만 영국과 부르고뉴파에 의해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왕세자 샤를 7세와 프랑스는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프랑스의 시골 소녀 잔다르크가 본인이 신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신의 계시를 들었다고 주장하며 전쟁에 나섰습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성 미카엘, 성녀 캐서린, 성녀 마르가리타로부터 "프랑스를 구하라"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성한 신의 계시로 보기도 하였지만, 일부는 광신자나 마녀로 생각하였습니다. 

군사적 천재성

 잔다르크는 프랑스의 시골 마을 소녀로 군사 교육을 받아본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전략적인 감각을 보여주었으며 끝내 프랑스를 승리하도록 이끌어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시골 출신의 어린 소녀가 군대를 이끌만큼의 리더십과 승리를 거머쥘 전술 능력을 발휘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본능적인 판단, 신념에 따른 행동이 오히려 기존에 있던 정형화된 전술과 달라서 전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재판의 조작 가능성

 잔다르크는 영국에게 붙잡혀간 이후 재판에서 마녀사냥을 당해 화형당했습니다. 하지만 이 재판 기록에는 많은 모순과 조작의 흔적이 있었으며, 당시 영국에게 큰 위협이 되었던 잔다르크를 죽이기 위하여 종교적인 명분으로 처벌한 것으로 보입니다. 

잔다르크 상상도, 그림

 

잔다르크의 재판에서의 문제점

1. 영국의 정치적 의도

 잔다르크는 전쟁에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며 영국의 목표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영국 입장에서는 잔다르크를 제거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유리한 상황이었으며, 당시 재판은 프랑스 북부를 장악한 영국의 통제에 있었고 재판의 주재자가 영국 측에 협력했던 피에르 코숑 주교였습니다. 이들은 잔다르크를 무너뜨림으로써 프랑스의 정치적, 종교적 정당성을 무너뜨렸습니다.

2. 재판 절차의 문제

  • 교회법상 이단의 재판은 반드시 교회의 관할에서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했지만, 잔다르크는 영국군의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심문을 받는 등 공정하지 않은 법적 절차로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 또한 변호사나 법적 대리인을 선임할 기회를 주지 않아 방어권이 박탈되었습니다.
  • 재판관들은 잔다르크에게 교묘하고 편향된 심문을 하며 말실수를 유도하였습니다. 즉 잔다르크가 어떠한 답을 하더라도 유죄가 될 수 있도록 협박성의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신의 계시를 받았느냐는 질문에 긍정으로 대답할 경우 이단으로, 부정으로 대답할 경우 거짓말을 한 죄를 물을 수 있습니다.)
  • 잔다르크가 남성 옷을 입고 다닌 것도 문제삼아 교회의 법을 어겼다고 비난했으나, 사실 전쟁에서의 남성 의복 착용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습니다.
  • 재판에서는 조작된 증인과 거짓 증언, 편향된 증인들이 많이 등장하였으며, 잔다르크에게 불리한 내용은 강조되고, 유리한 증언은 누락되거나 무시되었습니다.
  • 판결은 종교적 처벌을 위한 화형이었으나, 사실은 정치적 제거의 목적이 강했습니다.
잔다르크의 전쟁 활약

잔다르크의 전쟁 활약상

오를레앙 전투

 잔다르크는 프랑스의 오를레앙을 포위하고 패망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군사 전략에 참여하였고 군대를 단결시키고 적극적으로 앞장서 싸우면서 영국군을 물리쳤습니다. 전략적 요충지인 오를레앙을 해방시킴으로서 잔다르크의 최대 업적으로 꼽히며, 프랑스군의 반격이 시작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파테이 전투

 오를레앙 전투 후 영국군의 잔여 병력을 추격하였고 영국군의 강력한 궁수 부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로 잔다르크의 군사적 명성이 더욱 높아졌습니다. 

랭스 입성과 샤를 7세 대관식

 잔다르크는 샤를 7세를 왕으로 공식 즉위시키기 위해 랭스 대성당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프랑스군은 잔다르크의 주도하에 영국과 부르고뉴파의 저항을 뚫고 랭스로 진격했습니다. 결국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는 랭스 대성당에서 프랑스의 정식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이 대관식으로 샤를 7세의 정통성이 확립되고 프랑스의 사기를 상승시켰습니다.
 

파리 공략 실패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잔다르크는 영국과 부르고뉴파의 주요 거점인 파리를 공략하려 했으나 샤를 7세가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으며 파리 성벽의 강력한 방어력으로 결국 실패하고 공피에뉴에서 부르고뉴파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부르고뉴파는 거액의 몸값을 받고 영국군에게 잔다르크를 넘겨주었습니다. 
 

마치며

 잔다르크는 프랑스에게 단순한 전투에서의 승리 이상의 의미를 새겼으며, 절망적이던 프랑스 상황에서 한줄기의 빛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비록 정치적 희생양으로 종교재판을 통해 마녀사냥을 당했으며 화형에 처해졌지만, 결국 이는 중세의 종교재판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습니다. 1456년에서야 결국 잔다르크는 명예를 회복하였고 프랑스의 국민들에게 영웅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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