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지략
순조 때 써진 한경지략이라는 책에는 동묘(동대문 밖)의 남서쪽에 한양에서 가장 큰 채소 시장이 있었고, 이 채소 시장은 금남의 구역 즉, 남자들이 드나들 수 없었다고 합니다. 채소 시장에 여자만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순왕후
그 채소 시장의 근처에는 단종의 아내인 정순왕후가 단종이 죽고 과부가 된 뒤 살고 있었던 정업원이 있었습니다. 세조는 정순왕후가 잡일과 동냥으로 끼니를 이어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영빈정을 지어주고 조정에서 식량도 보내주었으나 완강히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년에는 베에다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일을 하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마을의 장안 부녀자들이 정순왕후를 도우려고 몰려들었고, 조정에서는 이를 금하자 부녀자들은 정업원 근처에 큰 채소 시장을 열었습니다. 이 시장은 여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시장으로 만들고 장사를 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정순왕후의 생계를 계속 도왔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남자가 출입하다가 조정에 밀고가 될 가능성이 있어 철저하게 금남의 구역으로 운영을 했다고 합니다.
동망봉
서울의 숭인동에는 동망봉이라는 봉우리가 있습니다. 동망봉은 동쪽을 멀리 바라본다라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으로, 열여덟 어린 나이에 남편과 생이별을 했던 단종비 정순왕후의 사연이 깃들인 곳입니다. 숙부의 정치적 야욕때문에 왕위에서 내쫓기고 짧은 생을 마감한 비운의 왕 단종, 그리고 그가 목이 졸린 채 동강에 버려졌다는 비보를 듯고 영월 땅을 바라보며 통곡했다는 곳이 바로 동망봉입니다. 문종이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그의 열두 살 난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올랐고 정순왕후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여 왕비에 간택 되었습니다. 이듬해 열다섯의 나이로 조선의 국모가 되었으나 열네 살의 어린 왕과 열다섯 살의 왕비가 기댈 곳은 서로밖에 없었습니다. 주위에는 야심이 가득찬 숙부들 뿐이였으며, 정치적 야욕이 강한 숙부는 이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결국 짧은 왕의 삶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정순왕후 가문의 몰락
세조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친동생인 금성대군과 조카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고, 세조의 오랜 친구인 정순왕후의 아버지도 이 역모를 같이 도모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에서 정업원이라는 이름의 초막에서 비참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끼니를 연명할 수 없어 초막 근처의 여자들이 금남의 시장을 열어 도와주게 정순왕후를 도와주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역적 죄인으로 사약을 받았으니 정순왕후도 노비로 신분이 전락했고, 머리를 깎고 정업원의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정업원의 비구니가 된 정순왕후는 세조의 도움을 거부하고 평생을 염색물을 들이는 일을 하며 살아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보우승가대학교 뒤편에 남아있는 자줏골 빨래터가 바로 그곳이며, 이곳에는 정순왕후의 일화가 전해지는 유적들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이런 유적이 아직까지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민초들이 정순왕후가 지킨 절개에 대한 존경심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정순왕후의 충절과 지역 여성들의 연대감을 보여주는 사례로, 매년 4월에는 '단종비 정순왕후 문화제'가 열려 그녀의 삶과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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